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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

[김교신선생] 조선지리 소고

 "조선 산천을 말하는 사람은 금강산의 기암괴석을 찬미하거나 백두산의 웅장한 봉우리를 감탄하는 것으로 끝나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조선식 해안의 길이가 무궁함을 표현하는 데나 사용할 말이다.

지자(智者)는 바다를 사랑한다는 말이 사실일진대, 무릇 지자로서 자처하는 이는 한산도 앞 바다에 작은 배를 띄워 놓고 나갈 길을 찾아 볼 것이다. 바다와 육지의 상대적 관계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이 허다한 섬과 산허리 사이사이에서 돛을 달아 노를 저어가 보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자기의 지략을 신뢰할 수 있는 자는 미친 자이거나 불세출의 영웅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확신하여도 무방할 것이다."(5. 해안선 편)

"<대영백과사전>에서 '고려'라는 항목을 찾아보라. 거기에는 이순신과 거북선의 그림 설명이 있으리니, 세계인들로 하여금 조선을 기억하게 한 것은 다도해의 무궁무진한 그 기묘한 이치를 파악할 줄 알았던 한 장부가 있었던 까닭을 알 수 있다. … 요컨대 3면의 해안선으로 보아도 조선 강토에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해안선만은 실상 과분하다 하리만큼 조물주가 우리 민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바다에 임한 한반도의 동서남 3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륙에 접한 북면도 백두산과 거기서 발원한 압록, 두만 양강으로써 천연적 경계가 확연한 지리적 위치로 보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 면적과 인구로 보나, 금수강산의 산악과 변화무궁한 해안선의 지세로 보나, 이 위에 天惠로 주신 기후로 보나, 한 국면 또는 한 무대의 중심적 위치로 놓인 그 待接으로 보나, 조선의 지리적 요소에 관한 한으로는 우리가 불평을 토하기 보다 만족과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넉넉히 한 살림살이를 부지할 만한 강산이요, 넉넉히 인류사상에 큰 공헌을 제공할 만한 活舞臺이다. 그러나 조선의 과거 역사와 현상을 꿰뚫어 본 이는 누구든지 그 위치의 불리함을 통탄하여 마지 않는다.

황해가 대서양만큼 넓거나 압록강 저편에 알프스 산맥같은 높고 험란한 연봉이 둘러 샀더라면, 조선 해협이 태평양만틈이나 넓었다면 좀더 태평하였을 것을 하고 한스러워 한다. 그렇지도 못하니 중국·일본·러시아 등 3대 세력 가운데 끼여서 좌충우돌하는 형세에 반만년 역사도 영일이 없이 지나왔다고 듣는 자로서 동정의 눈물을 머금게 한다. 그러나 이는 약자의 비명인 것을 면하지 못한다.

약자가 한갓 태평을 구하여 피신하려면 천하에 안전할 곳이라곤 없다. 남미 페루에 先住하였던 인디안 잉카족의 수도 쿠스코는 우리 백두산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어도 에스파냐인들의 참혹한 침략을 피할 수 없었고, 테베트는 해발 4,000미터 이상의 고원에 비장된 나라였으나 천하 최고의 히말라야 산맥도 신비국으로 하여금 영국인의 잠식을 피하게 하는 장벽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비겁한 자에게는 안전한 곳이 없고 용감한 자에게는 불안한 땅이 없다. 무릇 생선을 낚으려면 물에 갈 것이며, 무릇 범을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하는 것이다. 조선 역사에 편안한 날이 없다고 함은 무엇보다도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여실히 증거하는 史實이다. 물러나 은둔하기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는 이만한 데가 없다.

이 반도가 위험하다고 불평만 한다면, 차라리 캄챠카 반도나 그린랜드島의 빙하에 冷藏하여 둘 수밖에 없는 백성이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며 정치적으로 고찰할 때에, 조선 반도에 지리적 결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다만 문제는 이 반도에 사는 백성의 소질, 담력 여하가 중요한 소인이라고 할 것이다.

눈을 돌려 정신적 소산, 영적 생산의 파악으로 향한다면 조선 반도에는 특이한 희망이 있다고 확신한다. 유대 민족이 바빌론, 페르샤, 이집트, 앗시리아 등 강대한 세력이 교착한 중에 처하여 자연계의 사막과 峻嶺과 寒熱과 맹수 등의 감화 이외에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조석처럼 流動無常한 세계 역사의 활무대에서 異邦의 자연숭배와 같은 미신에 빠지지 않고 능히 唯一神敎의 건전한 신앙을 굳게 믿었던 것과 같이, 반도의 백성이 과거 반만년의 역사를 올바로 성찰한다면 안전한 백성과 강대산 국민으로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바를 구비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사상이나 발명은 모르나 지고한 사상, 곧 神의 경륜에 관한 사상만은 특히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당하고 유린당하여 生來의 오만의 뿌리까지 뽑힌 자에게만 계시되는 듯하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위탁하기 위하여서는 저들에게서 온갖 것을 빼앗고 갖은 치욕을 지워 주었다. 역사적으로 이웃 국가에 정직한 일을 볼 수 없이 될 때에 맑은 마음을 백성에게 두신 이의 요구가 무엇인 것을 우리는 고요히 대망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일반 문화로 보아서 동방 고대 문명이 구미제국으로 西漸을 시작할 때에 희랍 문명의 독특한 꽃이 찬연히 피었던 것처럼, 인도의 서역 문명이 東漸할 때에 지리적 架橋와 같은 동반도에서 이채있는 문화를 출현하고라야 以東에 광명이 전해졌다. 현금은 도리어 태평양을 건너 온 문화의 조류가 태백산과 소백산의 줄기를 넘어 백두산록까지 침윤하였으니 서에서나 동에서나 모름지기 고귀한 광명이 출현한 다음에는 이 반도가 암흑한대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처지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동양의 온갖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해야 할 바 모든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여 낸 엑기스(精素)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 볼 수 있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