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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생각들

저항의 문제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현대 사회에는 국가의 명령에 항상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 -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 이 있지만, 중요한 기독교 사상가 가운데 이런 견해를 견지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누구도 권세에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에 어긋하는 것을 하라고 요구하면, 우리로서는 국가에 불복종하는 것이 허용될 뿐 아니라, 그럴 의무가 있다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옳다는 말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주목을 끌었던 상황은 국가가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그 무엇을 시킨 경우가 아니라, 국가가 신민이 보기에 하나님의 법에 상반되는 일을 행하는 경우였다. 이 경우에도 상당 부분 의견이 일치했다. 마침에 모두가 내린 결론은, 법에 대한 불복종과 폭력 사용을 수반하지 않는 한, 그런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허용될 뿐 아니라 심지어 그럴 의무조차 있다는 것이다. 정권을 바꾸는 일이나 법과 제도를 개혁하는 일마저도 말이다. 


마침내는 불복종과 폭력의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되었다. 처음에는 종교개혁자들은 저항은 하되 시민 불복종의 형태나 폭력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윤리적으로 정부에게만 폭력이 허용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불의를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핍박에 관해 깊이 성찰한 끝에 결국 그들은 정치 권력을 쥔 자가 모두 정당하게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특히 국민에게 "잔학하고 악명 높은 상처"를 주며 자기 권한을 벗어나는 행위를 한 관료는 합법적 공권을 상실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 이들은 "자동적으로 스스로를 흉악한 사적 시민의 지위로 전락시킨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할 권한이 없다. 처음에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경우 정치적 직책을 가진 다른 사람들 - "그보다 낮은 행정관"이나 "국민의 치안관" - 이 그 범죄자를 규제하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칼뱅주의자들은 사적인 시민들도 때로는 불경하게 폭정을 휘두르는 지배자에 대항해 무기를 들고 법을 위반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 때로는 시민이 그렇게 할 의무가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저항 운동의 폭력보다 정부가 휘두르는 폭력을 훨씬 더 너그럽게 보아 준다. 피로 얼룩진 금세기에 저항 운동이 저지른 폭력과 정부가 휘두른 폭력을 비교해 보면 전자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된 것은, 정부가 아무리 최악의 폭력을 휘두르더라도 어쨌든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생각에 단호히 도전한다. 잔학하고 악명 높은 상처를 입히는 정부는 그 합법성을 상실한 것이고, 그런 정부의 관료들은 범죄를 저지른 민간인의 지위를 가질 뿐이라고 말이다. 이런 결론이 옳다면, 정부와 저항 운동 간의 적대 관계를 생각할 때 고려해야 할 핵심 사항은, 민간인 편에서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하는 일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만일 교회가 사회적 세계에 등을 돌리지 않고 그것을 개혁하는 일이 자기 소명임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그런 불의와 폭정과 권리 박탈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싸우는 기관이 될 수 있을까?


... 일부 교회는 나치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미와 폴란드에서 이미 주요 저항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 교회의 행동은 단지 인간적 공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의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그런 행동이 결코 허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주는, 우리의 존재 바깥에서 오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우리의 존재 바깥에서 오는 능력으로부터 힘을 공급 받는다. 그들은 민족들을 초월하는 한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해 실망하기 쉽다. 샬롬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교회 교인들이 하는 활동에만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마자. 그러나 교회가 오랜 암흑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그래도 새 날을 가리키는 인상적인 표지이자 성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있다. 역사 속에서 늘 성경을 전하는 일꾼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나사렛 예수를 가리켜 보여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는 그 심부름꾼이 타락했을 때라도 그 말씀을 증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자기도 놀랄 만큼의 저항과 소망의 씨앗을 심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중에서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