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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글들

[교회와 신앙] 왜 교인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가

1. 오늘날 교회의 문제

왜 교인들이 변하지 않는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교인들의 삶과 인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룬 양적 팽창에 비해 그 영적 성숙과 성화의 진전은 매우 저조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그러기에 구원과 성화의 심각한 괴리현상을 극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

1) 무율법주의적 혼란
왜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성화의 공백(sanctification gap)’이 야기되었는가? 우리는 그 원인을 우선적으로 우리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잘못된 가르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축복과 은혜에만 초점을 맞춘 설교가 한국교회 안에 도덕적 해이를 불러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윤리적 실패는 은혜만을 전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은혜를 잘못 전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본 회퍼(Bonhoeffer)의 말로 표현하자면, 값진 은혜를 ‘값싼 은혜’로 잘못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에 무율법적인 혼란을 초래한 값싼 은혜의 복음은 어떤 것인가? 가장 보편적인 것은 아마도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며 성화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의하면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될 뿐이다.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실제적인 변화가 없어도 칭의에 근거해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과도 거리가 멀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도 그 둘 사이의 긴밀한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항상 함께 가는 것이며, 실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다만 논리적으로 구별될 뿐이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지체없이 그리고 필연적으로 성화가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그와 동시에 거룩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그 누구도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하나의 끈으로 엮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둘을 논리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로마가톨릭과 같이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칭의가 어느 정도 신자의 실제적인 거룩함(성화)에 근거한 것으로 보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 구속의 사랑과 은혜의 성격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해서는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의 위협에 대비해서는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 연결성이 무시될 때 칭의의 교리는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죄 속의 삶을 은밀히 합리화하는 구실로 삼는다. “바르게 살지 못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니까, 죄를 지어도 또 용서받으니까”하는 안일한 생각 속에 죄를 심상히 여기고 신앙의 방종과 나태에 빠진다.

그리하여, 본회퍼가 개탄했듯이, “죄인을 의롭게 하는 교리가 죄를 정당화하는 교리로 되어 버렸다.” 이렇게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변질된 교리는 옛사람을 부인하고 성령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신자의 중대한 의무를 교묘히 회피하는 좋은 구실을 제공한다.

더불어 죄를 끊어버리지 않아도,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짓 안위를 안겨준다. 가장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 천국갈 수 있는 신앙의 최저 기준치를 설정해 주고 거기에 신자들을 안주하게 한다. 결국 믿음은 회개와 순종의 대용물이 되어 버리며, 그 내용과 의미가 텅비어버린 껍데기로 전락해 버린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sola fide)의 교리는 칭의에 있어서 행함의 역할을 배제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벨카우어(B.C.Berkouwer)가 잘 지적했듯이, ‘오직’이라는 표현은 믿음만이 참된 선행의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육신적 행위를 밀어내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 오게 하는 통로가 된다. 동시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며 역사하는 채널이 된다(갈 3:2~ 5)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산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직 믿음이란 말은 육신의 열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율법적 행위를 배격한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믿음만이 성령의 은혜로 인한 참된 선행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2. 새로운 율법주의

은혜와 축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가르침이 한국교회 안에 윤리적인 나태와 방종을 조장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제는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가 점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은혜에 치중한 설교가 무율법적 혼란을 초래한다면, 윤리적 설교는 다른 극단,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은혜를 “거룩함의 열매를 반드시 생산하는 은혜”로 제시하지 못한 메시지가 한국교회에 윤리적 문제를 야기했다면, 신자의 윤리적 책임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 안의 은혜의 풍성함을 밝혀주지 못하는 설교 또한 교회의 영성에 심각한 폐해를 끼친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 많은 교인들은 도덕적으로 각색되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진 율법적인 메시지에 짓눌려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생명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꼭 한국교회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것은 현대교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필립얀시(Philp Yancey)는 그의 베스트셀러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개신교 안에 만연해 있는 고질적인 병폐인 무율법주의적 혼란보다 율법주의가 더 교묘하고 무섭게 은혜를 위협하는 요소라는 것을 탁월한 대중적인 필치로 설득력 있게 밝혀주었다. 개신교의 생명력을 시들게 하는 것은 값싼 은혜가 빚어낸 무율법적 혼란만이 아니다. 최근 기독교 상담과 내적 치유를 다루는 저명한 학자들은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율법주의적 신앙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것이 개신교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가톨릭교도들보다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 이러한 (도덕주의적, 행위주의적) 왜곡으로 억압당하는 사람의 비율이 더 크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주의와 선행의 종교가 신교의 핵심으로 재진입하였다. 그 변화는 너무나 교묘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투르니에는 한 개신교 신자가 자신에게 들려준 의미심장한 말을 소개한다. “개신교는 은혜를 얻기 위해 엄청난 선행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 같지만 가톨릭은 신부에게 구하면 누구에게든지 이 은혜를 자유롭게 나눠주는 것 같습니다.”

<상한 마음의 치유>라는 저서로 잘 알려진 데이빗 씨맨즈도 이런 문제가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안고 있는 정서적 영적 갈등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는 신자들의 신앙이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은혜 중심에서 행위 중심으로 전환되어 간다고 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 시작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율법적 성향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는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바르게 행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즉, 그들은 ‘하지만 이 시점부터는 하나님도 내가 적어도 어떤 수준의 삶을 수행해 내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분명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우리 노력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낼 수 있고 행위로 간격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씨맨즈의 지적과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으나, 성화 과정에서 그 사랑과 은혜를 실제 의지하고 누리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구원받는 데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믿지만, 구원 후 신앙생활에서는 자신의 경건의 노력과 열심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내려는 고집스러운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 율법주의와 싸운 은혜의 투사 루터마져도 이 옛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백하였다. “나는 과거 20년 동안 은혜의 메시지를 전해왔고 그것을 나 자신이 스스로 믿어왔지만, 지금도 내가 무엇인가를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기를 원할 뿐 아니라 나의 거룩한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교환하려는 구습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믿기가 여전히 힘들다”

개신교 신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철저히 은혜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율법주의자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그것은 그들 머리 속의 지식보다 그들 안에 깊숙이 잠재해 있는 율법주의적 성향과 욕구가 은밀히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계속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감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경건의 노력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생활 속에 평안과 기쁨을 누림보다 오히려 가시지 않는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시달린다. 그들은 모두 죄책에서의 자유함을 선언하는 칭의 교리를 신봉하면서도 실제 삶 속에서는 병적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투루니에의 말과 같이 “일반적으로 그들은 이론적, 교리적 차원에서 죄사함을 믿고 있지만, 그것을 그들의 내면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와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개신교 강단에서 전파되는 성화론이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적절한 처방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믿음과 행함, 은혜와 윤리를 적절하게 연결시키지 못한 엉성한 성화의 메시지가 신자 안의 율법적 성향을 자극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대한 불감증을 심화시킨다.

종교개혁 덕분으로 개신교 신자들은 칭의에 있어서는 율법주의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으나, 성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율법주의의 족쇄에 매여 신음하게 된 것 같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자신 안의 율법주의적 성향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자가 되기 위해 그는 끊임없는 고행과 금욕으로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그럴수록 자신 안에 번민과 두려움과 좌절만이 깊어가는 영적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려는 헛된 수고에서 벗어났다.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가 대신 치른 영적 홍역 덕분에 그 곤욕을 되풀이하지 않고 무사히 칭의의 관문을 통과하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율법주의의 망혼이 이제 성화의 과정에서 다시 살아나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종교개혁이 칭의의 복음을 밝혀준 공헌을 남겼다면, 지금 우리는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거스르는 신율법주의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성화의 복음을 분명히 제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3. 칭의와 성화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의 위협은 교회 안에 항상 존재한다. 교인들 중에는 무율법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이 있는 반면에 율법주의로 치우치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강단에서 전파되는 메시지가 듣는 이들의 성향에 따라 굴절되어 받아들여지고 뒤틀리게 해석되어 적용된다. 은혜를 좀 더 강조하는 설교를 자주 들을 때 전자의 속성을 가진 교인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실패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은혜를 남용하기 쉽다. 반대로 윤리에 치중하는 설교가 빈번하게 전해질 때, 후자에 속한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경건의 노력과 도덕적 열심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는 율법주의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이와 같이 어떤 이들은 율법주의로, 또 다른 이들은 무율법주의로 치우치기도 하지만 이 두 성향은 모든 교인들 안에 항상 공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율법주의자인 동시에 무율법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를 의뢰하는 율법적인 교만이 뿌리박혀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제멋대로 살려는 무율법적 방종이 꿈틀거리고 있다. 인간의 율법주의 성향은 은혜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은혜로만 가능한 윤리까지 배격하게 된다. 역으로, 인간의 무율법주의 성향은 윤리를 무시함으로써 결국 윤리적 삶을 위해 주어진 은혜를 껍데기 은혜로 변질시켜 버린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경향,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뿐 아니라 윤리까지 배격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인간의 부패성으로 인해 복음이 교묘히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은혜와 윤리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부단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 선진들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복음의 핵심을 양극단적 오류로부터 보존해 왔다. 바울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은혜와 윤리의 적절한 조화는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와의 논쟁을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에 대응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근거함을 역설하는 동시에, 예상되는 무율법주의적 반론(“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 아래 거하겠느냐” 롬 6:1)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은혜에 근거한 윤리를 강조한다.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적 요소를 안고 있던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을 배격하기 위해 오직 은혜에 근거한 칭의론을, 다른 한편으로는 은혜는 반드시 윤리적 삶을 산출한다는 사실을 각각 치밀한 논증으로 부각시켰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인 동시에 구별되어야 할 ‘이중적 은혜(two-fold grace)’이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는 같은 근원에서부터 흘러 나온다. 칭의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기초하듯이, 성화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한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에 걸쳐 항상 함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다양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이것들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대응하여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실제적인 변화나 거룩함은 칭의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한다. 칭의의 근거는 우리 밖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만이 칭의의 완전한 공로적 근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는 구원의 확신을 가능케 하며,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을 더 온전히 밝혀준다. 그리하여 성화의 참된 기초, 즉 확신과 자유와 감사를 재 발굴하였다.

동시에 칼빈은 개혁주의 칭의론이 성화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교리라는 비난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강요 3권에서 구원론을 성화에 관한 논의로 시작한다. 그리고 3권 11장에 가서야 칭의론을 다루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성화를 칭의보다 먼저 논한 것은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순서이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로마 가톨릭의 공격을 분쇄하기 위한 의도에서 계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성화를 칭의보다 앞세움으로써 개혁주의 칭의론이 성화를 간과한다는 비난을 원천에서 봉쇄하려 한 것이다. 바르트가 말했듯이, 칼빈은 성화에 ‘전략적 우선성’을 부여한 동시에 칭의의 ‘논리적 우선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로마서에 지시된 바울의 구원론과 맥을 같이한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에 맞서서는 성화와 구별된 칭의를 강조하였고(롬 3~5), 무율법주의의 반론을 배격하기 위해서는 칭의와 연결된 성화(롬6장)를 논하였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4. 성화와 ‘오직 믿음’

개신교 강단에서 자주 나타나는 성화론적 오류는 성화와 믿음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다. 칭의를 논할 때는 믿음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성화를 다룰 때는 믿음보다는 행함을 더 강조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화에서도 우리는 믿음의 영역을 초월하지 않는다. 성화의 과정에 들어가서는 믿음의 영역을 벗어나 행함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오직 믿음’의 원리는 칭의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화 과정에 들어서면 신자는 이 원리를 떠나 신인협동체제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오해가 율법주의가 잠입할 틈새를 열어준다.

칭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성화의 과정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힘을 의지해 살아가려는 헛된 율법적인 수고를 그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만 계속 신세지며 사는 것은 자기 의를 숭배하는 인간의 교만한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한다. 은혜만을 의존하는 ‘오직 믿음’의 원리는 너무도 단순하고 쉬운 성화의 길로 보이기에 우리 안의 일종의 직관이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은 오직 믿음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될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 이 말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오직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면 성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과 행함이 필요없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 말은 성화과정에서 인간의 행함이 ‘오직 믿음’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오직’은 인간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이는 오직 십자가만이 칭의의 공로인 것같이 또한 성화의 근거임을 주목하게 한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은 것 같이, 오직 십자가의 효력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어 간다. 그것은 십자가에서부터 죄를 이기는 능력, 거룩하게 사는 효력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오직 믿음’의 비결은 은혜의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율법적 행함을 몰아냄으로써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밀려들어오는 채널을 활짝 열어 놓는데 있다. ‘자기 의’의 성곽으로 둘러 쌓인 인간의 마지막 보루를 허물어뜨림으로써 우리를 자신 안에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는 철저히 연약한 자로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리에 서게 한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는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강단에서 전파되는 성화에 관한 설교들은 온통 신자의 책임과 사명, 그리고 열심을 고취시키는 윤리적인 지침과 권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예수 안에 주어진 은혜의 풍성과 영광은 온전히 밝혀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칭의 뿐 아니라 성화에 관한 설교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설교자는 성화가 우선적으로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행하심에 근거한다는 진리에 좀 더 깊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행하시기에 오직 이 신적 사역의 토대 위에서만 우리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성화에 대한 설교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경륜과 부르심, 그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내포된 성화론적 함축과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성령사역의 다이내믹을 심도 있는 고찰을 통하여 밝히 증거함으로써 이에 대한 확신 있는 믿음 위에 서게 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이 믿음의 채널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의 바탕 위에서 신자의 책임의 특성과 중요성을 선명하게 밝혀 주어야 한다.

성화 과정에서 신자는 부단히 경건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의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가 그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존하는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정적주의 신앙이 아니라 은혜를 힘입어 능동적으로 책임을 수행해가는 역동적인 신앙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의 노력은 ‘은혜를 향한’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인한’ 행위이다. 은혜를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은혜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조건이 아니라 그 은혜의 결과이며 열매인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의 책임보다 앞선다. 그리하여 신자의 노력을 헛된 수고가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산출하는 생산적인 수고가 되게 한다.


5. 성화의 기독론적 바탕

전통적인 성화의 메시지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성화의 기독론적인 바탕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예수의 구속사역이 칭의와는 직결되지만 성화와는 칭의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이차적으로 또는 부수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이해되기 쉽다. 여러 신학자들은 구원의 서정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에 이런 위험성 이 내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곧 칭의와 성화가 논리적인 순서를 따라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나열된 구원의 서정에 의하면, 성화는 칭의라는 방편을 통해 오직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칭의와 성화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며 계속 연결되어 진행된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그 결과 구원은 ‘성화 없는 칭의’로 얻고, 구원 후의 삶은 ‘칭의 없는 성화’로 이루어 간다는 오해를 낳게 된다.

이것이 실제 개신교 안에 자주 나타나는 복음의 왜곡이다. 전자는 본훼퍼가 말한 ‘값싼 은혜의 복음’을, 후자는 개신교 안에 새로운 율법주의를 태동케 하였다. 값싼 은혜의 복음은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며 성화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구속사역에 근거한다. 칭의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성화도 같은 근거 위에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신자의 성화는 신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신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 가운데 다시 살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부터 신자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살게 하는 능력, 다이내믹이 유출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흘러나오는 이 효능이 곧 “신자의 성화의 영속적인 원동력이다”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칭의와의 관계에서 갖는 의미는 개신교 가르침의 전명에 부각되어 왔으나 성화와의 관련성은 충분히 고려되지 목했다” 근래에 들어와서야 이에 대한 신학적인 작업이 구체화되었다. 1960년대에 발표한 결정적인 성화론이라는 논문에서 존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칭의뿐 아니라 성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는지를 성경적으로 잘 밝혀주었다. 머레이의 견해에 의하면 예수를 믿을 때 칭의와 함께 결정적인 성화가 일어난다. 이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났기에 그 바탕 위에서 점진적인 성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성화는 점진적일 뿐 아니라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머레이는 “신약에서 성화에 관해 사용된 가장 특징적인 용어들은 어떤 진행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완성된 결정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 했는데, 여기서 “거룩하여지고‘라는 완료형시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또한 로마서 6장 2절에서는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죄에 대해 죽었다는(롬 6:2) 말은 우리가 단순히 심리적으로 그렇다고 여겨야 하나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면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이 말은 우리 안에 모든 죄가 없어졌다거나 죄성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죄와의 결정적인 결별을 의미한다. 죄와 확실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었다’는 동사는 아오리스트 시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단회적이면서도 영구적으로(once-and -for all) 좌와 결별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죄와의 분리는 다시 번복될 수 없는 사건이다. 이것은 “죄의 지배에서 전격적으로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와 은혜가 왕노릇하는 영역, 생명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죄와 사망의 권세가 분쇄되는 하늘의 영역(엡1:3)으로 우리가 옮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것을 근거로 죄와 획기적으로 결별한 거룩한 이가 되었다. 이렇게 결정적으로 죄와 분리되어 새사람이 된 결정적인 성화의 사실은 점진적인 성화의 근본 바탕이 된다. 죄와 육신과 대적해서 싸우며 새사람 가운데 행하라는 점진적인 성화에 관한 모든 신약성경의 권면과 명령은 근본적인 성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곧 점진적인 성황에 대한 명령은 이 결정적인 성화의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성화 과정에서 ‘행함’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 구속의 은혜가 우리 안에 얼마나 놀랍고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어 주었는가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영적빈곤은 이 복된 사실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결핍된 것과 이 믿음을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영성훈련이 부족한데 그 근본원인이 있다.

예수를 믿을 때 칭의와 함께 획기적인 성화가 일어났다는 가르침은 개혁주의 구원론이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신앙의 방종을 초래한다는 비난을 불식시켜 버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역동적인 성화의 확실한 토대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성화의 다이내믹과 복음적인 특성을 분명히 밝혀 줌으로써 성화의 메시지가 율법주의로 치우치는 위험을 막고 이차 축복을 강조하는 성화론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해 준다.


6. 성화의 성령론적 다이내믹

1) ‘제 2의 축복’ 성화론
개신교 안에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것을 성령충만과 함께 회심 이후의 획기적인 체험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획기적 성화에 대한 견해는 웨슬리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일차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칭의와 회심 후에 성화를 획기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즉각적, 또는 온전한 성화라고 칭했다.

웨슬리의 뒤를 이어 일어난 성결운동과 ‘더 풍성한 삶 운동’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성화를 이차적이고 획기적인 경험으로 보았다. 그들은 대개 죄책과 형벌에서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구분했다. 신자는 칭의를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지만, 그 후에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를 체험해야만 실제적인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 자유하게 되어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사람에 따라 길거나 아니면 짧은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한다. 모든 신자는 믿을 때 칭의의 은혜에 참여하나, 성화의 은혜는 대개 나중에 가서야 이차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성화의 은혜를 받는 순간부터 신자의 삶과 사역은 그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이, 신자의 삶이 실패와 좌절과 신음으로 점철된 곤고한 삶에서 능력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승리의 삶으로 급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의 맥을 이어온 케직 사경회(Keswick movement)에서는 이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 체험을 자주 제 2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케직 사경회를 인도했던 마이어, 앤드류 머레이, 알 에이 토레이 같은 이들의 사역과 그들이 남긴 대중적인 경건서적을 통하여 이러한 성화론은 지금까지 많은 교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또한 디엘 무디 같은 부흥사, 에이 비 심슨, 이에 제이 고든, 모울 같은 이들도 케직 사경회의 성화론을 전파한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성경적 대안
신학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룩한 삶과 능력 있는 사역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이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하여 성화와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 사이에 중요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간접적으로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정통신학은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뿐 아니라, 성령충만이 주어진 오순절 사건과도 연결시킴으로써, 성화는 기독론적인 바탕뿐만 아니라 성령론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예수의 은혜뿐만 아니라 성령의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 Jr)도 정통교회에서는 중생에 있어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나 그 후 신자의 삶속에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신자의 삶의 출발점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 이후 성령은 거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으로부터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런 극단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가장 자주 나타났던 병폐로서 체험의 진공상태를 야기했고, 이는 결국 또 다른 극단, 즉 ‘두 번째 축복’을 주장하는 오류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Richard B. Gaffin, Jr. “The Holy Spirit”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3:1(fall 1980): 76)

이러한 양극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은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걸쳐 역동적으로 계속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계속 인도함을 받는 이’, 즉 ‘성령충만한 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롬8:9, 갈5:16, 엡5:18).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과 지배 아래 산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쓰였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성령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삶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갈 5:17), “성령으로 산다”(갈 5:25)는 표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든 피가 지적했듯이,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말들이 의미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더욱 강렬하고 부요한 은유적 표현이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처음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성화의 기독론적-성화론적인 바탕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죄와 분리된 성결한 삶,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회심 후 제 2의 축복을 체험할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줌으로써 웨슬리-오순절 운동의 가르침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에 걸쳐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누리는 삶으로 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로 인해 새로운 은혜체험에 대한 추구를 위축시키는 전통적인 성화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7. 성화의 공동체적 특성

우리의 신학이 그 내용뿐 아니라 그 구조적인 면까지 성경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기독론 다음에 교회론의 문맥 속에서 개인의 구원과 성화를 다루어야 한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예수와 연합하는 것은 예수의 몸 된 교회에 접붙임 받는 것을 의미하며,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인 교회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의 삶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삶이기에 성령 안의 삶인 것이다. 그 누구도 교회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지 않고서는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 고독한 개인으로서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몰론 공산 치하와 같은 특별한 상황 속에서 가시적 교회와 고립된 채 신앙생활하게 되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고립된 개인 신자는 이미 보편적인 교회의 일원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존재하며, 전체 교회의 기도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당한 이유 없이 자신을 교회로부터 고립시키는 사람은 성령 안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위배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화의 은혜가 교회의 예식과 제도를 통해 개인에게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수여되는 것으로 보았고 그에 반하여 일부 개신교에서는 성화의 은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제한시키는 경향을 나타냈다. 우리는 이런 성화에 대한 제도주의적 혹은 개인주의적 이해의 두 극단을 피하고 성화의 은혜가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령의 교제와 은사활용을 통해 역동적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영적 미성숙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교회가 제도적으로 경직되어 성화의 은혜가 활발하게 역사할 수 있는 성령의 코이노니아와 카리스마적 채널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평신도들이 가진 잠재력과 다양한 은사들이 사장되어 버린 채,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은 심각하게 마비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카리스마적인 공동체를 성화를 이해하는 일차적인 상황으로 삼았다. 그는 사랑과 자기부인과 같은 덕목을 개인 경건 생활의 좁은 범주에서 논의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품성들은 서로의 은사를 활용하는 역동적인 상호교류와 섬김의 삶 속에서 산출된다. 은사는 사랑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수단과 방편이다. 은사의 활용을 통하여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며 그리스도의 성품이 형성된다. 스나이더는 “그리스도인들은 은사를 활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신실한 은사 사역을 통해 그는 전에 결코 가능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깊은 자기 희생적 사랑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카리스마는 개인과 공동체의 성화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8. 성화의 선교적 목표

또한 성화는 선교론적인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의 목적과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선교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심과 동시에 세상으로 다시 내보내신다. 그들을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충실한 삶을 살므로 세상에 빛을 발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화는 세상 속에서의 빛 된 선교사역과 직결되어 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거룩성을 상실할 때 교회는 더 이상 세상 속에서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수행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회봉사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 속에서도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야 세상에서 빛 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 ‘걷다’(페리파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묘사하였다(갈5:16). 이는 걷는 것이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도 일상 속에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참된 영성은 종교적인 일을 할 때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 속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부드러움과 자유함이 영성의 질을 말해 준다.

그런 온유함과 자연스러움이 인격과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일상의 모든 평범한 것까지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는 증거이다.
매일의 평범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그리스도인의 밝은 모습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중대한 선교적 가치가 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선교사역은 꼭 거창한 종교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들 속에서 은혜로 사는 이들의 밝은 모습들이 이 사회의 도처에 점증되어 확산되어 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박영돈 교수 / 고신대학교

출처: 교회와 신앙 <http://www.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