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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글들

[성숙자반 부분 발췌] 주기도문에 대한 결론

주기도문에 대한 결론

첫째로,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방향과 틀 그리고 수준을 교정해 주는 기도의 거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매일 드리는 기도의 방향이 잘못 되지는 않았는지, 혹은 우리가 그릇된 기도의 틀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기도의 수준이 형편없지는 않은지 비추어 주고 교정해 줍니다.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의 개요이며, 기도의 정수이고, 기도를 가르쳐 주는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사복음서 자체가 이 속에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기도를 가르쳐 주는 유일한 기도가 주님의 기도이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의 정수,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주님의 기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를 교정해주는 거울입니다.

둘째로, 주님의 기도는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한 결단의 기도입니다. 단순하게 나의 욕구나 원하는 바를 아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숙을 위해 기도의 모범인 주님의 기도를 거울삼아 결단하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 하나님과 우리를 위한 삶의 결단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주님의 기도 속에 우리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도의 원천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을 때만 이런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있고, 그 결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 9절부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마태복음 6장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5-27)

이때까지 우리의 기도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 같은 수준 높은 기도를 드릴 수 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새보다 더 귀한 존재임을 진심으로 믿고 계십니까?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28-32)

우리 각자는 믿음이 적은 자입니까, 큰 자입니까?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고 계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 기도의 핵심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그의 의를 구하는 방법이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새들도 책임지시고 들풀도 책임지시는데, 당신을 위해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으려고 수고하고 애쓰겠습니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마 6:34)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는 적절하지 못한 번역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것으로 주어가 ‘내일’입니다. 즉 “내일이 되면 너희에게 내일을 주신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걱정하고 책임져 주실 터인데, 왜 피조물인 네가 걱정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이 부분이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4, 개역개정)

내일 일은 내일을 주신 하나님이 결정하시므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울러 주님께서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괴로움이 없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은 있습니다. 창조적인 괴로움을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 있어야 우리가 세상의 유혹을 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연약함을 내가 확인할 때에만 그분의 강함을 더 의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괴로움이 영원히 존속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날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괴로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로 끝입니다. 그 다음 날은 내일을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며 이렇게 사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만 주님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숙자반> 이재철목사님